도요안 신부 선종 10주기 추모 기획연재 1 관리자 ㅣ 2020-10-20 ㅣ 8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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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안 신부님을 기리며 “예수님은 늘 현재이십니다. 우리 가운데 현존하십니다.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도요안 신부님은 살레시오회의 여러 공동체에서 때론 집안 살림을 맡은 경리로, 때론 공동체의 아버지인 원장으로 소임을 하시며 도움이 필요한 많은 이들, 특히 젊은이들과 노동자들에겐 착한 목자의 모습으로 그들을 도왔고, 동료와 선후배 회원들에게는 형제로서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나누려 애를 쓰면서도 복음적 권고를 아주 철저하게 살았습니다. 특히 참으로 가난을 사셨습니다. 1971년 서울대교구의 노동사목위원회의 위원장으로 발령받은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그 길을 함께 걸어오신 신부님은 1990년 이후에는 수도회의 방침에 따라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에 파견되어 전적으로 노동사목에 투신하셨습니다. 교구와 수도회의 협력사목의 좋은 모범과 선례를 남기신 신부님은 우리 한국 사회와 노동계의 변화에 착한 목자의 마음으로 대처하시며, 여러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는 가난의 문제와 용감히 맞서셨습니다. 이주사목과 더불어 비정규직에 관한 문제에 많은 힘을 쏟으셨습니다. 그렇게 노동사목위원회 50년을 맞은 한국 가톨릭교회의 노동사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시느라 애를 쓰셨습니다. 그러던 중 2010년 11월 22일 오후, 우리 모두에게 신부님 선종의 슬픈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하시던 일을 마무리 하시고자 하는 마음에 점심식사 후에 컴퓨터 앞에 앉은 채 선종하셨습니다. 이제 도 신부님의 10주기를 맞아,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와 이주사목위원회에서 신부님을 기리며 기획으로 글을 연재합니다.
이주사목위원회는 노동사목위원회에서 2014년 2월에 분리되어 사목하고 있습니다. 2020년 도요안 신부님의 선종 10주기를 맞아 도요안 신부님을 추모하며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나자 보편교회는 본격적 변화에 순응하였으나, 한국교회는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본당 사목 차원에서 용어의 현지화와 전례 형식에 변화만 이루어졌다. 사목이 신심 단체와 본당 중심의 신앙 차원에 머무르는 수준이었고 ‘가톨릭 액션’은 생소하였으며, 특수사목 또는 사회사목은 낯설기만 하던 시절이었다. 교회 안으로는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 교회 밖으로는 산업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특수사목, 정확히는 노동사목의 필요성은 갈수록 절실해졌다. 그러나 이 분야의 전담 사제는 박성종, 한종훈 등 소수의 방인 사제가 있었을 뿐, 대부분은 메리놀, 골롬반, 살레시오 등 외국 선교회의 사제들이었고, 도요안 신부님께서는 이 중책을 훌륭하게 완수하셨다.
도요안 신부님은 이미 15년 이상 가톨릭노동청년회(JOC)를 중심으로 노동사목에 헌신하고 계셨다. 그 기초 작업으로 까르딘(Cardijn) 추기경의 방한을 성사시켰고, 그분의 JOC 행동 지침인 ‘관찰, 판단, 실천’을 회원의 훈련과 회합 등을 통해 생활화하셨다. 특히 1983년 전국지도신부로서 당시 현안이던 JOC 지도노선을 둘러싼 논쟁을 종식하였는데, 린츠(Linz) 국제평의회에서 야기된 혼란을 정리하여 반(反) 까르딘 노선을 불식하고 원래의 교회 정신으로 회귀하도록 심혈을 기울이셨다. 이 과정에서 오해를 받으셨고, 정신적 상처도 받으셨다.
1966년 김수환 주교께서 신설 마산교구장으로 부임하시어 공의회 정신이 한국교회에 본격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김 주교께서는 공의회 무렵 유학하시면서 현지의 상황을 소상하게 접하셨고, 귀국해서는 가톨릭시보 사장으로 공의회 문헌들을 지면에 직접 소개하셨다. 그리고 이른바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 때 JOC 총재 주교로 “주교회의 성명”을 발표하시어 교회가 한국 사회 현안을 최초로 공식적으로 다루고, 나아가 노동문제를 직접 해결하시고자 하셨다. 1968년 김 추기경이 서울대교구 교구장으로 서임되시고, 노동사목의 확립 강화를 위해 ‘도시산업사목연구회’를 설립하셨다. 도요안 신부님은 초대 위원장으로서 한국교회 노동사목의 초석을 놓으셨다.
이점홍 골롬바님(2018년 작고)의 희사로 2001년 성북구 보문동에 노동사목회관이 건립되고, 그동안 종로성당 곁방살이를 벗어나 노동사목위원회는 독자 공간을 갖게 됨으로써, 정기 회합과 활발한 사업 추진, 괄목할 출판 업적이 가능해졌다.
전문위원제도의 확립은 노동관계 연구 업무의 체계화를 가져왔다. 10여 명 내외의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매달 둘째 주 토요일 정기 회합을 하고 우리 사회 노동 분야 현안을 체계적으로 다루어, 그 결과물로 그해 노동 과제와 기본 방향을 설정함으로써 실례와 연구 경험을 바탕으로 한 종합 보고와 질의 모임을 대강당에서 개최하였다.
특히 허윤진(안드레아) 신부께서는 위원장으로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셨고, 도요안 신부님께서는 음양으로 이를 뒷받침하셨다. 노동사목위원회가 가장 활발하고 역동적인 업적을 발휘하고 축적하던 시기였다.
도요안 신부는 김수환 추기경과 사목 주안점이 같으셨다. “한 명이라도 구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자칫 이러한 태도가 팔방미인 또는 산만함으로 곡해되기도 했지만, 언제나 치밀한 사전 준비와 주어진 현실에서는 최선이었음이 확인된다. 즉 이론이나 사후평가 중심이 아니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실천 중심의 투신이었다. 투병 마지막 순간까지 노동사목에 혼신을 다한 신부님의 헌신은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었다.
요즈음 더 절실해지는 가르침은 우리 사회의 숨 막히는 극단적 권위 체제에 대한 극복 방법은 물리력에 의한 생경한 저항이 아니라, 문화 등 유연함을 통한 대처라는 것인데, 이 가르침이 새삼 그립다. 오스트리아의 식민통치 속에 이탈리아가 독립 쟁취를 위해 음악가 Verdi를 구호로 외친 것처럼. (이탈리아 자유 독립 투쟁이라는 단어의 첫 글자를 조합하면 VERDI라는 약자가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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